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체스카 도너 (문단 편집) == 여담 == * 저서로는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65239987&orderClick=LEa&Kc=#|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프란체스카가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부터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 참전 이후 [[유엔군사령부|UN군]]이 남쪽으로 철수하는 1951년 2월 15일까지 쓴 일기가 있는데 이를 엮어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라는 제목으로 시중에 [[책]]이 나와있다.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6.25 전쟁 발발 당시 [[이승만]]의 행적, [[카투사]] 제도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 고위층 자식들의 [[병역기피]], 부유층들의 [[일본]]행 등 당시의 사회상도 볼 수 있다. [[http://m.rw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625| 《농촌여성신문》 (2011.8.8.): 〈이승만 전 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6·25 비망록〉]]]와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95832707&orderClick=LOA&Kc=|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이 있다. * 잡지 《자동차생활》 1984년 10월 호[* 정확히는 2013년 10월 호에서 30년 전 기사와 광고를 다시 보여주던 것.]에서는 프란체스카와 며느리가 같이 기사에 나왔다. 이승만 생전 직접 운전하였으며 사후에는 며느리와 같이 장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 * 9촌 조카인 에르빈 프뢸은 1996년부터 2017년까지 총 21년간[* 오스트리아에서 최장 기간 주지사를 역임했다.]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의 주지사를 역임했고 10촌 종손인 요제프 프뢸은 오스트리아의 전 부총리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2614575|《중앙일보》(2013.9.15.): 〈프란체스카 여사, 오스트리아 유력 정치인 집안과 친척〉]]] * 이승만과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1934년 결혼 당시 이승만은 중혼, 프란체스카는 재혼이었고 이승만은 50대 후반, 프란체스카 도너는 30대 중반으로 임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노산에 가까운 연령대였다.[* 게다가 당시의 30대와 21세기의 30대는 다른 취급을 받았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이강석(1937)|이강석]]과 [[이인수(1931)|이인수]]는 [[양자(가족)|양자]]이다. || [[파일:ezgif-2-33083042f9.gif|width=100%]] || || 1952년 1월 1일, [[새해]]부터 [[최전방]]을 시찰하는 [[이승만|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추위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두툼한 파카 후드 모자를 꽉 쪼여서 대통령이 당황하고 있다. || * 젊은 시절엔 [[한국어]]에 서툴러 남편과도 [[영어]]로 대화했다. 자주 통역을 필요로 하여 영어에 능숙했던 [[박마리아]][* 박마리아는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한 경험이 있어 [[영어]]를 잘 했다.]와 의존 관계가 형성되다보니, 박마리아의 남편이자 무능했던 [[이기붕]]이 이승만의 최측근이 되고 박마리아 부부의 장남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가족)|양자]]가 되는 결과를 낳은 한 원인이 되었다.[* 사실 이승만 주변에는 박마리아하고 [[이기붕]] 말고도 [[윤치영]]과 [[임영신]] 등 미국 유학파출신 인사들이 더 있었지만 이 둘은 이기붕 내외와 대조적으로 프란체스카를 탐탁치 않아했다. 심지어 자기네들끼리 있을 때 "이 박사께서 한국 여성과 결혼하셨으면 더 좋았을텐데."라는 식으로 뒷담화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언어 소통이 원활치 않아 격의 없이 지낸 한국인이 많지 않았던 탓인지 프란체스카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도 세간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우연히 만난 오스트리아인이 "당신은 저와 같은 오스트리아 사람이군요!"라고 반가워하자 "난 한국 사람입니다. 우연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을 뿐."이라고 대답한 [[https://www.hankyung.com/opinion/article/202003233842i|일화]]가 있다고 하며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103100087|다른 일화]]로는 [[한복]]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해당 문서에 있는 사진들도 [[한복]]을 입고 찍은 것이다.] 그래도 말년에는 어지간한 한국어는 할 줄 알게 되어 집안에서 한국어과 영어를 섞어서 사용했다고. * 프란체스카의 한국어 구사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cntT4ZYrrQ&t=20m29s|이기붕이 국회의장을 역임할 때 그의 비서실장이었던 한갑수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는 프란체스카가 모처럼 국무위원들 앞에서 이승만이 알려준 한국어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문장이 "오늘 이 사람 눈깔과 주둥이 아프지 아니하지만, 대가리와 배때기 아픕니다." 였다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폭소했다고 한다. 그러자 프란체스카는 국무위원들에게 내 발음이 그렇게 나쁘냐고 물었고 옆에 있던 [[박마리아]]가 "표현이 적절하지 않은 비속어이다"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가리키며 이승만이 저 말을 알려줬다고 소리쳤고, 프란체스카의 반응을 본 이승만은 너털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 [[파일:Screenshot_20230204_233001_YouTube.jpg|width=100%]] || [[파일:Screenshot_20230204_233014_YouTube.jpg|width=100%]] || ||<-2> 말년에는 간단한 [[한글]]도 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직접 작성한 [[가계부]]. || * 그나마 프란체스카의 개인적인 면모가 어땠는지 증언한 사람으로는, 먼저 해방정국 당시 [[이승만]]의 공보비서를 역임했던 최기일 교수[* [[장준하]]와 [[김준엽]]의 친구이기도 하다.]가 있다. 최기일 교수의 회고록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에 따르면 프란체스카는 주변 사람들에게 다소 인색하고 냉정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승만과 정세를 논의하기 위해 [[돈암장]]을 방문했던 [[안재홍]]과 [[송필만]] 등에게 대놓고 "나가요."라고 화를 내면서 밀쳐대기까지 했던 탓에 이 때문에 정내미가 떨어져 돈암장에 발길을 끊은 인사들도 몇 명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승만의 생일을 맞이한 날에 이승만의 지지자들이 가져다 준 진귀한 음식들마저 프란체스카가 거의 다 독식하다시피하고 그나마 먹다 남은 것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상할 때까지 보관했다가 결국에는 버려졌다고 한다. 하지만 최기일 교수의 [[이승만]]·[[김대중]]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 등에 대한 혹평이 지나치게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은 독자의 세밀한 취사선택을 요하는 부분이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2/12/13/2002121370299.html|이북출신 팔순 지식인의 현대사 증언 - 최기일 박사 자서전 '3부' 소개 문단 중에서 (조선일보, 2002.12.13.)]]] 이와는 대조적으로, [[1947년]] 이화장 뒷집에 살았던 인연으로 이승만 일가와 14년간 가까운 이웃으로 생활했던 방재옥(1930년생)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 전 대통령은 매우 자상한 분, 프란체스카 여사는 매우 알뜰한 분이었다고 증언하며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평했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103100088| 월간조선 뉴스룸 (2001년 3월호): 李承晩 대통령 내외와 14년간 생활한 方在玉씨 인터뷰.]]] * 2012년 오스트리아 빈 한인문화회관 앞 길이 2㎞ 오솔길 이름이 '프란체스카 도너 리의 길'로 명명되어, 한-오스트리아 양국 우호의 상징이 되고 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5/07/2012050700078.html| 조선일보 (2012.5.7.): 오스트리아 빈 한인문화회관 앞 길이 2㎞ 오솔길에는 대한민국 첫 영부인 이름이.]]] * 대통령 부인 집무실 및 접견실로 사용되던 청와대 본관 내 무궁화실 벽면에, 초대 영부인으로서 프란체스카 여사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https://n.news.naver.com/mnews/ranking/article/020/0003430685?ntype=RANKING&sid=001| 동아일보 (2022.5.26. 문화면 기사 하단) : 대통령 침실 앞엔 피아노, 욕실엔 사우나 靑속살 32년만에 공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